《물거울》은 최근까지 세라믹을 주매체로 전시를 선보여 오던 임소담이 몇 년만에 다시 회화를 그리고 싶다는 강한 이끌림을 동력 삼아 드로잉룸에서 개최하는 7번째 개인전이다. 작가는 익숙해지기보다 낯설어짐으로써 다른 시각성을 창출하고자 해 왔다. 많은 작가들이 대상을 혹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전환함으로써 기존과는 다른 예술적 가치를 추구해 왔다. 투시를 통해 시각적 환영을 창출하는 오랜 전통부터 주관적인 감정을 대상에 이입하던 근대를 지나 이미지의 과격한 소비를 반영하는 최근까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임소담도 초기에는 일견 비슷한 태도를 견지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회화에서 세라믹으로, 그리고 다시 회화로 돌아오는 흥미로운 여정을 보면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임소담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의 결에 맞다고 생각하여 수집한 이미지를 같은 크기의 종이(38x28cm)에 서로 다른 비율의 이미지로 담아냈다. 작가가 보기에 여백이 더 필요해 보이는 이미지는 옆쪽 혹은 위쪽으로 치우치듯 화면을 구성한다. 종이 전체의 면적을 활용하지 않은 이미지는 여백을 남기고, 이미지의 가장자리는 여백과 자로 잰 듯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는다. 주로 버려진 인형, 뜯어진 벽지, 공사현장, 밤 풍경 등 어쩐지 쓸쓸함을 자아내는 풍경을 담은 이미지는 작가의 손이 가는대로 어느 정도의 삐뚤빼뚤함을 남겨둔 채 종이의 일정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간혹 과 같이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인물은 개성을 담보하기보다 풍경의 한 요소로 기능할 뿐이다. 재현된 이미지는 인터넷, 지인이 찍은 사진을 포함하여 여러 경로로 획득한 이미지로 쉽게 넘길 수 있는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작가는 셔터를 누르는 짧은 시간만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를 유심히 보고 다시 배치해 봄으로써 이미지에 대한 비의지적, 수동적 소비를 지양한다. 2015년에 대형 캔버스로 이행하면서도 이러한 태도는 계속 유지된다. 이제 화면은 120호를 상회한다. 작업이 커지면서 작가는 전체를 그리고 그 안에 세부를 채워 넣는 방식 대신, 세부를 그려내면서 전체로 확장시켜 나가듯 작업해 나간다. 작가는 캔버스의 정형된 크기가 이미지의 확장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이미지의 규격을 정하지 않고 캔버스 천을 벽에 고정시켜 그려나간 후 그림이 완성되면 캔버스를 그에 맞게 재단했다. 그 때문에 캔버스는 저마다 특수한 사이즈를 가진다. 작가의 초기 작업은 이미 익숙해져 있는 습관적 시선을 버려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지를 통일된 규격에 다르게 위치시켜보고, 부분에서 전체를 구성하는 시도를 통해 이미 존재하는 대상과 이미지를 화면에 다시 안착시켜 본다. 이 과정에서 학습된 회화 방법을 버리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고안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16년에 세라믹과 회화를 처음 같이 선보인 후 2022년까지 세라믹을 중점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다. 틈틈이 회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회화 또한 세라믹 작업의 연장선에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세라믹 작업을 할 때 회화와의 관계만을 고려해서 말한 것이고, 전체 작업 맥락에서 보자면 세라믹이 회화의 연장선에 있다. 세라믹은 회화의 익숙함을 버리기 위해 택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손으로 빚어내는 붓질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작가가 “입체 드로잉”과 같다고 언급한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티타임드로잉》 작가노트, 2019). 이 시기 작가는 도자기를 만들면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감각한 경험을 캔버스에 역으로 담아냈다. 재료, 온도, 유약, 수축률, 밀도 등의 변수는 작가가 처음 구상하고 제작하고 완성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면서 어느 것 하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우연적인 요소는 작가의 제작 습관을 버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소쇼룸에서 선보인 《티타임 드로잉》(2019)에서는 오묘하게 생긴 여러 형태의 컵과 접시를 제작하여 일상적인 티타임을 낯설게 만들었다. 두 개, 혹은 네 개가 연이어진 찻잔이라던가, 손잡이에 달린 묵직한 사슬이라던가, 납작한 찻잔은 명쾌한 손짓보다는 생각하고 망설이는 손짓을 불러온다. 이전의 회화에서 작가 자신이 세계를 바라보는 수용자의 태도를 재고하여 시각적 습관을 지양하고 능동적으로 재조직했다면, 이 시기부터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습관을 능동적으로 재조직하는 시기이며 이를 타자로까지 확대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다년간의 세라믹 작업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신체에 깃든 회화의 습관을 덜어냈다. 이번 개인전에서 다시 회화를 그려보기로 결심하면서 작가는 붓질의 버릇도 털어내 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 대상을 자신 나름대로 해석하여 그려오던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떠오른 이미지를 포착하는 방법을 택한다. 무언가를 보고 그릴 때는 재현되는 대상을 모사하기 위하여 붓질이 제한된다. 보지 않고 무언가를 그릴 때는 그려지는 형상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되며 시도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여기에 더해 이미지를 재현할 때 대상을 비추고 있는 물웅덩이 혹은 물결을 그리기로 하면서 사정은 보다 복잡해진다. 그리려고 한 대상은 물의 표면에서 흩어진다. 그러므로 작가는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 대상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동시에 물의 일렁임과 빛의 반사를 떠올리며 형상을 해체시켜야 한다. 여기에는 한 번의 오역이 아니라 적어도 세 번의 오역이 전제된다. 재현할 대상이 부재하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재현하려 한다는 점, 그런데 그 대상이 물에 비친 상태라는 점, 물은 거울처럼 정지되어 있지 않고 바람이나 움직임에 의해 너울을 만들어내고 그 또한 재현을 모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3번의 불가능한 시도가 중첩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매개체이지만 언어의 한계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전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그림 또한 마찬가지로, 언어든 그림이든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을 담보한다. 임소담은 그림의 필패를 인식하면서 이를 더욱 모호한 단계로 끌어올린다. 이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대상을 재현하려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라믹을 통해 제작의 습관을 버렸던 것처럼, 대상이 비친 물결을 ‘보지 않고’ 그리는 실험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재구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닿지 않는 대상에 닿기 위해 더듬어 나가는 붓질은 의식적이고 반성적으로 수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전히 담겼다는 믿음에는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의도적인 빈틈에서야 비로소 회화적 과제가 수행될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전시에서 우선 반짝이는 물결의 다양한 색채와 움직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흩어져 있어 불분명하게 보이는 형상에서 무언가를 찾게 된다. 주로 타인의 시선에서 대상을 보았을 때 표면적이거나 불완전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들, 방치되거나 버려진 것을 유심하게 지켜보고 상상하며 그려낸 것들이다. (2023)은 임소담이 천안에 위치한 레지던시 일대를 산책하면서 자주 만나게 된, 어느 집 대문에 아주 짧은 목줄로 메어 있는 개를 그린 작업이다. 인간의 돌봄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반려동물에게 인간은 암암리에 예쁨을 받을만한 겉모습과 행동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가 매일 마주한 그 개는 낯선 이에게 사랑 받기에는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겉모습을 갖지 않은 믹스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는 자신의 본분을 잊은 듯 낯선 이에게 조차 애정을 갈구하였다. 지나가는 이 중 누군가가 시선이라도 한 번 건네기나 할지 염려하면서 산책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집 앞을 들렸다. 날씨와 시간을 암시하는 다채로운 물결을 좇다 보면, 물결에 반사된 믹스견의 모습과 눈에 비친 작가의 형상을 어렴풋하게 볼 수 있다. 동네 곳곳에 붙어 있는 전단지도 집 앞에 방치된 개처럼 누군가가 시선을 건네기를 기다리고 있다. 짐작건대 치매를 앓고 있는 집안의 어르신을 찾고 있는 전단지는 그의 얼굴과 몸에서 특징적인 부분을 간략히 서술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목격된 옷차림과 사례금을 큼지막하게 언급하고 있다. (2023) 시리즈는 그러한 전단지로부터 떠오른 상념,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을 환영인 듯 재현해 본다. (2023)은 산길이나 절로 향하는 길에서 흔히 발견되는 소원돌탑을 담는다. 어쩌면 돌 하나의 무게만큼 가벼운 소원일지라도 돌을 쌓는 이들은 한 순간이나마 염원을 담아 조심스럽게 돌 위에 돌을 얹는다. 우리는 누구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사정을 다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 그것이 사건으로 발화되면 외피만을 목격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러 작업 가운데 (2023)과 (2023)는 다른 작업과 결을 달리한다. 어디서부터 엉클어지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넝쿨의 꼬임 속에 종잇조각과 손의 제스쳐가 보인다. 넝쿨이 어지러이 꼬여 있지만 사실적이기보다 감각적이다. 종잇조각에 그려진 것은 시간표와 자연을 모사한 드로잉이다. 시간표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연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시간을 분절하고 체계화한 결과물이다. 자연을 모사한 드로잉 또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변화를 순간이나마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꼬여 있는 넝쿨은 인간이 어떤 대상을 감각하기에 앞서 선경험적으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암시는 것으로 보이며, 시간표와 드로잉은 무언가를 인식하고 감각하려는 인간의 의지처럼 느껴진다. 이는 작가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림을 그리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쓴 작업노트에서 자신이 그리고 있는 ‘물’이라는 대상의 모호성을 언급하면서 “내가 지켜보는 대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비추고” 있다고 말한다. 몇몇 작업에서 물, 물결, 물의 색, 잔상, 반사된 상 등이 어지러이 얽혀있는 가운데 작가 자신이 비춰진 모습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임소담은 이전의 작업노트에서도 그림에서 관심이 있는 것은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를 교정하여 결과물을 부산물처럼 얻어내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습관은 오랜 시간에 걸쳐 신체에 각인된 수동적 행위이므로 습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각성과 능동적인 실천을 요한다. 내외적으로 축적되어온 회화의 방법론을 탈피하기 위하여 임소담은 작업의 분기점마다 스스로 과제를 설정하고 이를 수행하면서 극복해 왔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저 그려진 형상을 표현하는 수사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작업하는 태도와 수행성을 표현하는 수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임소담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의 결에 맞다고 생각하여 수집한 이미지를 같은 크기의 종이(38x28cm)에 서로 다른 비율의 이미지로 담아냈다. 작가가 보기에 여백이 더 필요해 보이는 이미지는 옆쪽 혹은 위쪽으로 치우치듯 화면을 구성한다. 종이 전체의 면적을 활용하지 않은 이미지는 여백을 남기고, 이미지의 가장자리는 여백과 자로 잰 듯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는다. 주로 버려진 인형, 뜯어진 벽지, 공사현장, 밤 풍경 등 어쩐지 쓸쓸함을 자아내는 풍경을 담은 이미지는 작가의 손이 가는대로 어느 정도의 삐뚤빼뚤함을 남겨둔 채 종이의 일정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간혹 과 같이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인물은 개성을 담보하기보다 풍경의 한 요소로 기능할 뿐이다. 재현된 이미지는 인터넷, 지인이 찍은 사진을 포함하여 여러 경로로 획득한 이미지로 쉽게 넘길 수 있는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작가는 셔터를 누르는 짧은 시간만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를 유심히 보고 다시 배치해 봄으로써 이미지에 대한 비의지적, 수동적 소비를 지양한다. 2015년에 대형 캔버스로 이행하면서도 이러한 태도는 계속 유지된다. 이제 화면은 120호를 상회한다. 작업이 커지면서 작가는 전체를 그리고 그 안에 세부를 채워 넣는 방식 대신, 세부를 그려내면서 전체로 확장시켜 나가듯 작업해 나간다. 작가는 캔버스의 정형된 크기가 이미지의 확장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이미지의 규격을 정하지 않고 캔버스 천을 벽에 고정시켜 그려나간 후 그림이 완성되면 캔버스를 그에 맞게 재단했다. 그 때문에 캔버스는 저마다 특수한 사이즈를 가진다. 작가의 초기 작업은 이미 익숙해져 있는 습관적 시선을 버려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지를 통일된 규격에 다르게 위치시켜보고, 부분에서 전체를 구성하는 시도를 통해 이미 존재하는 대상과 이미지를 화면에 다시 안착시켜 본다. 이 과정에서 학습된 회화 방법을 버리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고안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16년에 세라믹과 회화를 처음 같이 선보인 후 2022년까지 세라믹을 중점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다. 틈틈이 회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회화 또한 세라믹 작업의 연장선에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세라믹 작업을 할 때 회화와의 관계만을 고려해서 말한 것이고, 전체 작업 맥락에서 보자면 세라믹이 회화의 연장선에 있다. 세라믹은 회화의 익숙함을 버리기 위해 택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손으로 빚어내는 붓질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작가가 “입체 드로잉”과 같다고 언급한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티타임드로잉》 작가노트, 2019). 이 시기 작가는 도자기를 만들면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감각한 경험을 캔버스에 역으로 담아냈다. 재료, 온도, 유약, 수축률, 밀도 등의 변수는 작가가 처음 구상하고 제작하고 완성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면서 어느 것 하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우연적인 요소는 작가의 제작 습관을 버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소쇼룸에서 선보인 《티타임 드로잉》(2019)에서는 오묘하게 생긴 여러 형태의 컵과 접시를 제작하여 일상적인 티타임을 낯설게 만들었다. 두 개, 혹은 네 개가 연이어진 찻잔이라던가, 손잡이에 달린 묵직한 사슬이라던가, 납작한 찻잔은 명쾌한 손짓보다는 생각하고 망설이는 손짓을 불러온다. 이전의 회화에서 작가 자신이 세계를 바라보는 수용자의 태도를 재고하여 시각적 습관을 지양하고 능동적으로 재조직했다면, 이 시기부터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습관을 능동적으로 재조직하는 시기이며 이를 타자로까지 확대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다년간의 세라믹 작업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신체에 깃든 회화의 습관을 덜어냈다. 이번 개인전에서 다시 회화를 그려보기로 결심하면서 작가는 붓질의 버릇도 털어내 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 대상을 자신 나름대로 해석하여 그려오던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떠오른 이미지를 포착하는 방법을 택한다. 무언가를 보고 그릴 때는 재현되는 대상을 모사하기 위하여 붓질이 제한된다. 보지 않고 무언가를 그릴 때는 그려지는 형상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되며 시도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여기에 더해 이미지를 재현할 때 대상을 비추고 있는 물웅덩이 혹은 물결을 그리기로 하면서 사정은 보다 복잡해진다. 그리려고 한 대상은 물의 표면에서 흩어진다. 그러므로 작가는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 대상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동시에 물의 일렁임과 빛의 반사를 떠올리며 형상을 해체시켜야 한다. 여기에는 한 번의 오역이 아니라 적어도 세 번의 오역이 전제된다. 재현할 대상이 부재하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재현하려 한다는 점, 그런데 그 대상이 물에 비친 상태라는 점, 물은 거울처럼 정지되어 있지 않고 바람이나 움직임에 의해 너울을 만들어내고 그 또한 재현을 모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3번의 불가능한 시도가 중첩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매개체이지만 언어의 한계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전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그림 또한 마찬가지로, 언어든 그림이든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을 담보한다. 임소담은 그림의 필패를 인식하면서 이를 더욱 모호한 단계로 끌어올린다. 이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대상을 재현하려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라믹을 통해 제작의 습관을 버렸던 것처럼, 대상이 비친 물결을 ‘보지 않고’ 그리는 실험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재구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닿지 않는 대상에 닿기 위해 더듬어 나가는 붓질은 의식적이고 반성적으로 수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전히 담겼다는 믿음에는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의도적인 빈틈에서야 비로소 회화적 과제가 수행될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전시에서 우선 반짝이는 물결의 다양한 색채와 움직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흩어져 있어 불분명하게 보이는 형상에서 무언가를 찾게 된다. 주로 타인의 시선에서 대상을 보았을 때 표면적이거나 불완전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들, 방치되거나 버려진 것을 유심하게 지켜보고 상상하며 그려낸 것들이다. (2023)은 임소담이 천안에 위치한 레지던시 일대를 산책하면서 자주 만나게 된, 어느 집 대문에 아주 짧은 목줄로 메어 있는 개를 그린 작업이다. 인간의 돌봄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반려동물에게 인간은 암암리에 예쁨을 받을만한 겉모습과 행동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가 매일 마주한 그 개는 낯선 이에게 사랑 받기에는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겉모습을 갖지 않은 믹스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는 자신의 본분을 잊은 듯 낯선 이에게 조차 애정을 갈구하였다. 지나가는 이 중 누군가가 시선이라도 한 번 건네기나 할지 염려하면서 산책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집 앞을 들렸다. 날씨와 시간을 암시하는 다채로운 물결을 좇다 보면, 물결에 반사된 믹스견의 모습과 눈에 비친 작가의 형상을 어렴풋하게 볼 수 있다. 동네 곳곳에 붙어 있는 전단지도 집 앞에 방치된 개처럼 누군가가 시선을 건네기를 기다리고 있다. 짐작건대 치매를 앓고 있는 집안의 어르신을 찾고 있는 전단지는 그의 얼굴과 몸에서 특징적인 부분을 간략히 서술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목격된 옷차림과 사례금을 큼지막하게 언급하고 있다. (2023) 시리즈는 그러한 전단지로부터 떠오른 상념,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을 환영인 듯 재현해 본다. (2023)은 산길이나 절로 향하는 길에서 흔히 발견되는 소원돌탑을 담는다. 어쩌면 돌 하나의 무게만큼 가벼운 소원일지라도 돌을 쌓는 이들은 한 순간이나마 염원을 담아 조심스럽게 돌 위에 돌을 얹는다. 우리는 누구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사정을 다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 그것이 사건으로 발화되면 외피만을 목격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러 작업 가운데 (2023)과 (2023)는 다른 작업과 결을 달리한다. 어디서부터 엉클어지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넝쿨의 꼬임 속에 종잇조각과 손의 제스쳐가 보인다. 넝쿨이 어지러이 꼬여 있지만 사실적이기보다 감각적이다. 종잇조각에 그려진 것은 시간표와 자연을 모사한 드로잉이다. 시간표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연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시간을 분절하고 체계화한 결과물이다. 자연을 모사한 드로잉 또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변화를 순간이나마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꼬여 있는 넝쿨은 인간이 어떤 대상을 감각하기에 앞서 선경험적으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암시는 것으로 보이며, 시간표와 드로잉은 무언가를 인식하고 감각하려는 인간의 의지처럼 느껴진다. 이는 작가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림을 그리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쓴 작업노트에서 자신이 그리고 있는 ‘물’이라는 대상의 모호성을 언급하면서 “내가 지켜보는 대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비추고” 있다고 말한다. 몇몇 작업에서 물, 물결, 물의 색, 잔상, 반사된 상 등이 어지러이 얽혀있는 가운데 작가 자신이 비춰진 모습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임소담은 이전의 작업노트에서도 그림에서 관심이 있는 것은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를 교정하여 결과물을 부산물처럼 얻어내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습관은 오랜 시간에 걸쳐 신체에 각인된 수동적 행위이므로 습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각성과 능동적인 실천을 요한다. 내외적으로 축적되어온 회화의 방법론을 탈피하기 위하여 임소담은 작업의 분기점마다 스스로 과제를 설정하고 이를 수행하면서 극복해 왔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저 그려진 형상을 표현하는 수사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작업하는 태도와 수행성을 표현하는 수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