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임소담은 꾸준히 물가의 풍경을 그렸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수한 상상의 산물도 아닌 그 그림들은, 말하자면 꿈과 기억을 구별하지 않는 마음의 눈을 탐구한 결과였다. 한편에는 희미해지는 기억과 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면의 시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수면에서 빛이 반사, 투과, 굴절되면서 발생하는 상의 왜곡 효과가 있다. 작가는 물의 안팎을 물리적으로 구획하는 동시에 광학적으로 중첩시키는 수면의 일렁임이 외부 세계와 접하는 마음의 흔들림과 유사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물거울》(2023)은 이러한 유비 관계를 회화 작업에 적용한 첫 번째 시도였다. 여기서 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수면에 비친 사람들의 흐릿한 모습, 잔물결의 반짝임, 물 밑으로 보이는 조약돌과 그 위로 솟아나는 식물 줄기, 달 그림자, 낮게 나는 새 등은, 작가가 실제로 본 것을 반영하는 한편으로 그런 인상들이 투영, 변형, 재배치되는 어떤 내면의 극장을 암시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신비한 물가를 거닐며 물에 비친 것들을 그리운 듯이 바라보지만 어째선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진 않는다. 그의 시선은 수면에 고정되어 있다.
이 고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은 자기애에 빠진 신화 속 나르키소스를 연상시킨다. 확실히 작가는 자기 자신이라는 수수께끼에 붙들려 있다. 다만 이 경우는 물에 비친 상에 매혹된 게 아니라 물거울 자체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가 본 것들이 어디에 저장되었다가 어떻게 다시 의식 위로 떠오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작가는 수면을 바라보듯이 자기 자신에게 밀려 들어오고 다시 빠져나가는 이미지의 운동을 관찰한다. 그러나 이런 은유로 상황을 묘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왜냐하면 작가 자신이 물거울로서, 즉 이미지를 통과시키는 불안정한 채널로서 그림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완성된 그림을 응시하는 관람자의 자리 저편에, 아직 미완성된 그림 앞에서 머뭇거리는 화가의 자리가 있다. 이는 〈Yellow Leaves〉에서 상당히 직설적으로 묘사된다. 물풀 같은 구불구불한 선들로 가득 채워진 화면 한 편에 초록색 나뭇가지를 그린 작은 그림이 있고, 다른 한 편에 그 그림을 움켜쥐려는 듯이 펼쳐진 손이 있다. 짙은 녹색으로 얼기설기 칠해진 손은 사냥감이 눈치채지 않도록 위장한 포식자 같기도 하고, 또는 그저 물감과 사투를 벌이는 화가의 손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이 손이 붙잡고 싶어하는 것은 언젠가 보았던 나뭇가지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창조되어야 하는 미지의 그림이다.
회화는 눈과 손의 협응이 필요한 활동이다. 화가의 눈은 예전에 본 것들, 지금 화면 위에서 손이 그려내고 있는 것, 앞으로 그 붓자국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림의 가능성들을 동시에 본다. 이런 관점에서 수면은 그림의 과거, 현재, 미래가 중첩되는 화가의 시각장에 대한 유비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화가가 정말로 미래를 본다면 그건 어떤 마법의 거울이 작동한 결과가 아니라 화가 자신의 눈과 손이 연합해서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낸 결과다. 임소담의 작업에서 손은 화가의 눈을 미래로 인도하고 잠재적 그림을 실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는 수변 풍경을 그리기 전부터 눈과 손이 서로의 움직임에 자유롭게 반응하는 가운데 어떤 이미지가 출현할 수 있는지 계속 연구해 왔다. 일례로, 백색 세라믹 판 위에 지난 밤 꿈의 편린을 송곳으로 새기고 그 위에 다시 푸른색 안료를 투명하게 덧바르는 ‘Drawing Dream’ 연작(2018)은 이미지를 지각, 변형, 생성하는 심리적 과정을 손이 주도하는 물질적 상호작용으로 연장한다. 흙을 이겨서 작은 도자 조각을 만드는 ‘입체 드로잉’ 작업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매체 실험들은 화가의 눈과 손이 시각 데이터를 수용, 출력하는 단순한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이미 본 것과 아직 보지 않은 것을 넘나드는 일종의 타임머신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모색한다.
나무 줄기 또는 또는 그저 얼기설기 뒤얽힌 붓질 사이에 파묻혀 있던 화가의 손은 《수평선》(2024)에서 무언가 집어 올리고 형태를 빚고 다듬는 여러 가지 포즈의 도자 오브제로 재출현했다. 그 손들은 붓을 들고 물감을 바르지 않지만 허공 속에서 제각기 무언가를 지향하고 있다. 언젠가 임소담은 숙련된 작업자의 손을 관찰하면서, “의식적으로 배워오고 반복했을 동작들이 무의식의 영역에 새겨져 (…) 눈과 머리의 지시를 받기 이전에 움직이는 독자적인 생물처럼 보인다”고 썼다. 실제로 손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대상을 ‘보고’ 그에 개입할 수 있다. 작가는 그림을 만드는 손의 고유한 논리를 존중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숙련되어서 정해진 방식으로만 움직이는 자동기계가 되는 것은 경계한다. 화가의 타임머신은 눈과 손이 서로를 능숙하게 보조하면서도 의외의 방식으로 상대를 놀라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작동한다. 이미지의 운동과 물질적 변형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서로를 이끌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성 단계에서 예측 불가능한 변화가 일어나는 도자 작업은 시각적 상상력과 촉각적 지각을 자극하면서 화가의 눈과 손이 상호작용하는 습관적 방식을 탈피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도자 조각만으로 구성된 전시 《응달》(2020)과 《티타임 드로잉》(2022)은 선명한 상을 맺지 못하는 모호한 꿈과 기억을 손으로 건져 올린 듯한 내밀한 분위기를 풍겼다. 작가는 그림의 형태로 외재화되기 이전의 비정형적인 심리 상태를 흙에 투영하여 직접 주무를 수 있지만 유약을 바르고 구운 최종 결과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한다. 성형과 완성 사이의 이런 간극 속에서 도자 조각은 내면의 재현으로 환원되지 않는 낯선 사물로 출현한다. 이는 회화와 구별되는 도자 작업만의 매력이지만, 자기가 만든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시간 지연이 어느 순간 작가에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원래 임소담은 그림을 계획적으로 쌓아 올리기보다 얇게 펼쳐 나가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이는 눈과 손의 즉흥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그림의 자연스러운 출현을 보기 위해서였다. 새해 첫날에 추운 바닷가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미지의 그림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손을 움직이는 두근거리는 감각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임소담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가볍고 투명한 붓질로 미약한 예감을 따라갈 때도, 흙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내면의 형상을 빚어낼 때도 그랬다. 그림을 맞이하는 장소는 매번 바뀌는 것 같지만 결국 화가의 눈과 손 사이에 있다. 그리기의 기쁨과 불안 속에서, 화가는 가상의 수평선과 마주한다.
2022년 이후 재개된 임소담의 회화 작업은 이러한 화가로서의 자기 인식을 반영한다. 《물거울》의 알레고리적인 그림들이 자유로운 그리기에 대한 열망과 의심을 일렁이는 물결 속에 녹여냈다면, 《수평선》의 평평한 화면들은 좀 더 초연하고 단호한 붓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더는 수면에 비친 상을 상세히 묘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상 회화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거기 없는 무언가를 떠올리도록 촉구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추상 회화도 아니다. 이 같은 이중 부정은 전시명과 동일한 〈수평선〉이라는 작은 그림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옅은 파란색으로 칠해진 화면을 횡단하는 한 줄의 백색 선 또는 가느다란 여백이 있다. 비어 있음으로써 시선을 끄는 이런 균열 또는 구멍들은 전시된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얗게 반짝이는 수면, 물감을 긁어냈거나 색채를 걷어낸 부분들은 모두 화면 너머의 어떤 다른 차원을 암시한다. 연못과 우물과 먼 바다를 응시하는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어지는 어떤 창문 같은 것을 더듬어 찾는다. 그림은 어떻게 미완성 상태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여지를 개방할 수 있을까? 이는 드로잉에서 더 나아가 회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임소담의 현재진행형의 질문이다.